오프숄더, 오디세우스, 크림힐트, 이상과 금홍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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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옷은 싫다길래 오프숄더 블라우스를 사줬는데 그냥 어깨를 덮은 채로 입고 왔다. 오프숄더로 나온 옷을 이렇게 입을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좀 더 젊던 시절, 그러니까 뭔가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사랑을 쫓던 그때라면 틀림 없이 이런 행동을 싫어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재밌는 사람은 아니다. 어린 여자들은 젊음과 아름다움으로 인한 사람들의 관심에 익숙해, 자신들이 지루한 존재라는 걸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라는 이런 말을 내가 하면 비웃음이나 사겠지. 이건 하루키가 한 말이다.

하지만 아마 그런 점 때문에 더 그녀가 좋은 걸지도 모른다.

첫번째, 쿨한 것처럼 글을 써도 나는 쿨하지 않다. 자주 인용하는 프로이트의 문구처럼, 섹스에 있어 변태라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자기 배우자의 기질로서 수용할 수 있는가는 별개다. 번뜩이는 재치가 있지만 성적 기벽이 있던 사람은 수 없이 보아왔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의 일화. 그녀들은 노래를 불러 뱃사람을 유혹해 바다에 뛰어들게 만든다. 선원들에게 귀마개를 씌운 오디세우스는 정작 본인은 밧줄로 몸을 묶었을 뿐 귀마개를 쓰지 않고, 얍삽하게도 그녀들의 노래만 잘 즐기다 나왔다.

과연 이 사회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이 올바른가, 또는 서로의 성기를 죽을 때까지 독점하는 현행 결혼 제도가 합리적인가라는 본질적 질문과 별도로 나는 바다에 뛰어들 자신은 없다. 적어도 나는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된다는 이중잣대는 들고 있지 않으니 너무 심한 비판은 하지 말아주길.

두번째. 뭐가 잘났는지는 모르겠다만 난 원체 나르시스트라 자기 주관이 강한 사람과는 잘 맞지 않았다. 공통점에 운명 같이 끌리고 불타올랐던 적은 많지만, 이내 서로 내가 주인공이라고 다투다가 이별하곤 했다. 자아가 무거운 사람 둘이 함께 있으면 숨쉴 공간이 없다.

알고 지냈던,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았던 참 글을 잘 쓰던 미인의 여성 블로거가 있었다. 정작 그 사람 남편은 글 같은 건 전혀 쓰지 않는 공대 출신의 단순한 남자였다. 항상 뭔가 생각하고 쓸 거리가 있다는 것을 '영혼이 깊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장점도 단점도 아니다. '깊다'라는 것은 '어둡다'도 될 수 있고 '예측할 수 없다'도 될 수 있다. 나는, 그녀가 아마 그 남자를 어렵지 않게 컨트롤하며 살고 있을 거라는 가설을 세워보았다.

아니 실은 기질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기질이라는 것도 특정 조건에 부합해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니까. 문화권에 따라서는 그걸 영원히 알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의외로 흔하다.

어딘가 직관적으로, 나는 그녀가, 본인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의 신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크림힐트와 닮았다고 판단했다. 온전한 순수함과, 끔찍한 요부이자 악녀라는 두 가지 모습. 하지만 공존하지는 않는다.

머리가 나쁘지 않은 사람은 사랑에서 상처를 받으면 반드시 자신을 바꾸게 되어 있다. 거절이든 배신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 시간이 누적되면 안 좋은 의미에서의 어른이 된다.

실은 오프숄더를 잡아 당겨 어깨를 가리고 온 그녀도, 시일이 지나면 분명 내가 치를 떨었거나 또는 치를 떨게 만들었던 그 모습을 따를지도 모른다. 다만 이 시점에 그녀의 삶에 개입했다는 것이 그녀에게 어떤 다른 결과를 안겨줄까.

나는 상처를 통해 인간이 성장한다고 믿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상처를 통해 성장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들은 상처가 없이도 잘 자랐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당신을 상처없이 지켜주고 싶다. 심지어 그대가 전혀 성장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상이 금홍에게 쓴 글이다. 다소 철딱서니 없는 모습으로 남는다고 해도, 어쩌면 나와는 달리, 사랑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이 사람에게 나는 늘 너무 예뻐, 이 사람에게만은 세상 누구보다 내가 가장 훌륭한 여자일거야, 남자들은 다 똑같아도 우리 남편은 달라라는 그런 생각으로 쭉 성장 없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틀릴 수 있는 가설일 뿐이다.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자기 딴에는 제법 머리를 썼지만 자기 꾀에 자기가 당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시도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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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같은 경우, 본문의 글에 나온 내용 때문에
사랑을 시작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네요
지독한 외로움보다
상처받고 상처주는 일들과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공유하는 것
나 자신을 돌보기에도 벅찬데 도저히 그렇게 할 자신이 안생기네요ㅎㅎㅎ.... 찌힝...ㅠ.ㅠ
@홍보해

사실 저도 어느 시점부터인가 연애에 흥미가 떨어지더라고요 ㅎ 정확히 말하면 연애가 아니라 자극적인 감정이 싫은걸지도 ㅋㅋ

여자 친구들은 많이 만들었지만 정말 치열하게 나를 던지고 상처 주고 상처 받았던 건 거진 6, 7년 전이네요 ㅋㅋ 온전히 자기 의지로 행동하고 자기가 책임도 지는 게 자기 삶이라면 서로 간의 감정이 복잡히 뒤섞인 연애는 사실 피곤한데가 많으니까요

그래도 또 누구를 만나는 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요즘에는 격렬했던 사랑이 그립기도 하네요. 그런 거 앞으로도 안 할거라는 거 뻔히 알지만 ㅎ

으아 격렬한 사랑 으아

으아 안 해~ 으아

ㅋㅋㅋㅋ필사했으니 보러와요

들렸다가요. 오늘도 좋은 하루되세요~

네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좋은 하루 되세요~~

자아가 무거운 사람 둘이 함께 있으면 숨쉴 공간이 없을수도 있지만
자아가 부족한 사람둘이 만나도 서로 기대만 부풀려 숨쉴공간이 없죠

자아가 깊고,어두워보이는 블로거분이 단순한 사람을 만나 적당히 다루고 살지도 않을것 같아요.///
제 생각엔
깊은 사람은 깊은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서로 알수 있죠...
각자가 각자의 성향을 인정할 때 비로서 함께 살수 있는것 같아요
쉽지 않지만 맘 단단히 먹으면 엄어렵지도 않은것 같아요
서로를 놓아주는 사랑요 ㅎㅎ ㅎㅎ

자아가 깊고,어두워보이는 블로거분이 단순한 사람을 만나 적당히 다루고 살지도 않을것 같아요

사실 그 분의 논지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남자를 처음 본 순간, 이 남자가 날 구원해줄 거라는 걸 알았다.

가 그 사람이 쓴 글이었죠. 누가 누구를 구원한다.... 제 인생의 장르와는 거리가 멀지만 여하간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관계였다고 생각합니다.

깊은 사람은 깊은 사람을 만난다... 제가 쓴 글은 결혼이나 이혼도 해보지 않은 사람의 가설에 불과하고 설령 결혼이나 이혼을 모두 해봤다고 해도 다 케바케기 때문에 100% 답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비슷한 사람보다는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과 관계가 오래 유지된 경우가 많긴 하지만... 이 역시도 어떤 표본이 될 만큼 충분하지는 않을수도 있겠죠 ^^;

자아가 강하지 않더라도, 생활로 둘이 얽히면 분명 생활 자체가 중심이 된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만족하고 있다면 이미 한 자아 정도만 설 공간에 두 자아가 살아가고 있거나...비슷한 다른 모습이거나.

그래서 전 노래에 이끌려 바다에 빠진 생활이 행복하단 사람의 깊이만큼은 믿지 못함ㅋ애초에 노래도 거의 못 들었잖음?

생활 자체가 중심이 된다... ㅋㅋ 하긴 맞네요, 결혼도 안 해보긴 했지만 정작 결혼 생활의 문제는 자아가 어쩌구 하는 심오한 문제가 아니라 생활 자체에서 오는 갈등이 많다더군요

애초에 노래도 거의 못 들었잖음?

어떤 의미인지 한 번 더 읽고야 알았습니다 ㅋㅋㅋㅋ 정말 훌륭한 댓글입니다

굳이 경험해보지 않아도 가족들과 사는 것만으로도, 본질적으로 같은 생활의 부대낌이 모든 공간을 차지하게 되니깐요. 그래서 "사랑(이라 쓰고 정이라 읽는)"으로 상호 보상을 하는 것이구요.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제가 말한 "깊이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란 "결혼한 사람"이 아니라 "거기에 만족하는" 그러니까 결혼의 자아에의 침해에 대한 아무런 고뇌가 없는 사람을 이야기한 것이고, "노래"란 뭐 매우 복합적인 것을 통칭한 것입니다. ㅋㅋ감사

저랑 생각이 많이 비슷하시네요 ㅎㅎ 나중에 아마 이 주제로도 글을 써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었습니다 ㅎㅎ 써주신 내용으로 충분히 이해했었으니까요 헤헷

헙 저도 쓸 생각입니다. 안티로맨틱으로 쓸지 다른걸로 쓸지는 모르겠지만요 헤헷

기대해보겠습니다 ㅋㅋㅋㅋ
사실 이 글은 몇 년 묵히고 스팀잇에 올리는게 맞았을텐데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이상과 금홍 저 문구 저도 참 좋아합니다. 제 책 한 구석에 적어놓고 있어요.

하하하하하하 lekang님 블로그에서 처음 본 문구입니다 ^^
제게는 비교적 최근에 감동을 준 글이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1. 오프숄더 여인은 지난번 찻집에서 회상하던 그녀와는 또다른 인물이겠죠?
  2. 이상이 금홍에게 쓴 글
    가슴설렌당. 멋져.
  3. 그냥 지나가는 유부녀가 한마디할게요
    결혼해도 예뻐보이고 싶어서 지방이식 생각중인 여자도 있답니다. 그게 남편에게든 나자신에게든 언제나 예쁘고 싶군요
  4. 그 미인의 여성블로거 궁금하네요. 혹시 스팀잇을 이제는 하고 있지 않을까요? 문체보고 알아채시는거 아닐랑가몰랑
  1. 다른 인물이죠
  2. 멋지죠 후훗 하지만 현실에서의 이상 같은 남자는 어떨지;
  3. 사실 '예쁘다'가 주제는 아니었는데..... 사실 이 글은 쓰고 몇 년 묵히고 퇴고해야 좀 더 의미전달이 명확했을텐데 그냥 올리게 되었네요
  4. 거진 10년 전에 알던 사람이고... 어쩌면 스팀잇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아마 보신다고 해도 크게 신경쓰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 이 친구 사유는 역시 이 정도까지 밖에 올라오지 못했군 하며 피식 비웃으실지도 ㅋㅋ 나쁘다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좋게 관계가 단절됐다고 말하기도 어려워서...
@admljy19님 안녕하세요. 써니 입니다. @torax님이 이 글을 너무 좋아하셔서, 저에게 홍보를 부탁 하셨습니다. 이 글은 @krguidedog에 의하여 리스팀 되었으며, 가이드독 서포터들로부터 보팅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아폴로 동전에 관한 기사와 그것을 마스터 스테이션으로 가져 와서 해독하고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 한 혁명에 관한 기사를 썼다.
당신이 그 기사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은 방법에 대한 제안이 있습니까?
https://steemit.com/coinkorea/@shortsegments/masternodes-apollon-masternodes

글 잘읽었습니다. 오디세우스...얍삽했군요. ㅋ

신화에는 참 곱씹어볼 의미가 많은 것 같습니다 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뒤늦게 이 글을 봤어요. @admljy19님의 타로풀이 글만 열심히 보고 있었는데, 새로운 모습을 본 것 같습니다.

자아가 무거운 사람 둘이 함께 있으면 숨쉴 공간이 없다.

는 말에 공감하다가, 또 다시 생각해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드네요. 묘한 여운이 남는 글입니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늦은 때'의 글이니 리스팀할게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걸 모두 알기에는 살아온 날도 적고, 어차피 다 케바케가 아닐까 싶네요. 그냥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글을 쓰다보니 이런 결론을 낸게 아닌가 싶습니다^^
리스팀 감사합니다. 팔로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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