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케빈으로부터 (4)] 소심인 이야기

in #kr6 years ago (edited)

소심인 이야기

   S o u l  e s s a y   F r o m  K e v i n  


from kevin 대문.jpg

 우주선 아폴로를 발사하던 역사적인 순간에 케빈 아놀드는 리사라는 아이에게 한 눈에 반한다. 수업 시간, 우주선 발사 카운트다운을 세던 그 때 케빈은 리사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카운트다운 0이 되었을 때, 리사가 케빈을 돌아보고 둘은 눈이 마주친다. 리사는 케빈을 보고 활짝 웃는다. 케빈은 그것이 사랑의 신호라고 생각했다. 케빈에게 아폴로호가 발사되던 그 순간은 리사의 마음이 케빈에게 발사된 순간이었던 것이다.

 케빈은 들뜬다. 마음은 리사로 가득 찬다. 그 눈빛, 그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리사가 나의 말과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우물쭈물하다가 리사가 실망하여 돌아서는 건 아닐까.

 우리 모두, 누군가의 눈빛이 잊혀 지지 않아서 가슴 뛰는 고뇌에 빠진 경험이 있다. 그 눈빛을 해석하기 위해 애쓰고, 그 신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던 순간 말이다. (기억이 안 나신다고? 기혼이시군요.)

 대담한 사람은 그 신호가 여운을 남길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바로 신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그랬다가 거절과 무안을 당해, 착각이 잦은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하고, 신호에 대한 가설을 제대로 검증해서 용기 있는 승리자로 등극하기도 한다.

 문제는 소심한 사람이다. 신호를 알아보긴 해야 할 텐데, 알아보는 과정은 순탄치 않다. 그의 머릿속엔 상대방의 반응이 한 스무 가지쯤 떠오른다. 대부분 부정적인 결과다. 상상만으로 이미 마음이 너덜너덜하다. 케빈 아놀드처럼 몇 번이나 수화기를 들었다 놓는다. 전화 번호를 누르는 순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고 생각한다. 괜히 들이댔다가 망신당할 것이 두렵다. 그 일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즉시 나의 이미지는 B급 중고 물건으로 전락할 것만 같다.

 케빈은 고심 끝에 수화기를 놓고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계획한다. 그녀의 동선을 따라 그녀가 다닐 만한 길목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아 나의 젊은 날, 난 왜 집으로 곧바로 오는 길을 놔두고 빙빙 둘러 오는 길을 골랐던가. 왜 내키지도 않는 족발을 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던가. 그녀를 만나기는커녕 시간만 허비하고 돌아와서는, 그래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 뭔가를 했다며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한편으론 씁쓸한 기분에 입맛을 다셨던가.

 예전에 내가 덜 소심했다면 지금의 내 삶이 나아졌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는, “그거 고민할 게 뭐 있어, 지금 보다 훨씬 나았겠지.” 라고 할지도 모른다. 내게 그 문제는 햄버거를 고르는 일처럼 간단한 게 아니다. 소심한 내 모습이 답답해 가슴을 쥐어뜯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나의 소심함은 그저 던져버리기엔 아까운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소심한 대신 상상력이 풍부한 나는, 소심인(小心人)인이 승리하는 이야기를 결국 머릿속으로 그려내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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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인을 위한 이야기




 아는 사람이 없는 어떤 모임에 가게 되었다고 하자. 그래 파티가 좋겠다. 난 지인 목록에서 유일하게 유력한 어떤 지인이 연 파티에 초대되어 간 것이다. 처음부터 혼자 가야했다면 아예 가지 않았을 테지만, 함께 가기로 했던 친구가 갑자기 설사병에 걸렸다. 친구는 지금의 상태로는 의지대로 괄약근을 조절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뒤늦게 파티의 불참을 통보한다. 난 파티장으로 향하는 중이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고, 옷차림에 공들인 노력이 아깝다. 그래 잠시 갔다가 오는 거야.

 파티장에 들어선지 1분도 채 안되어 깨닫는다. 아, 그냥 돌아갔어야 했어.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하지만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음료를 마셔도 입술이 바짝 마른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혼자 서성거리고 있는 나를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것 같다.

 그때,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와 똑같은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는 한 사람을 발견한다. 선하고 큰 눈에 하얀 피부를 가진 여인이다. 몸의 굴곡을 드러내는 원피스는 그녀가 평소에 운동을 즐긴다는 정보를 알려준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심장이 뛴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좋아진다. 너무 오래 보면 그녀가 눈치 챌 것 같아서 시선을 거두어들이는 순간 우리의 눈이 마주친다.

 우리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망망대해에 떠있는 사람이 나 혼자인 건 아니구나, 하는 걸 깨닫는다. 우린 난파선의 널빤지 조각을 붙들고 물에 떠 있다가 서로의 존재를 알아본 것이다. 소심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소심한 사람을 알아본다. 우린 엷은 미소를 입에 머금고 있지만, 서로를 직접 바라보진 않는다. 주변에 시선을 던지면서 서로가 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가려고 한다.

 사교성이 좋은 한 사람이 우리 사이에 끼어든다. 다행이다. 우리 둘 중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긴 힘들었을 것이다. 사교성이 좋은 사람은 우리 둘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우리에 대해서도 묻는다. 우린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얻게 된다. 사교성이 좋은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다른 그룹을 향해 떠나간다. 우리가 대화를 시작하는데 이제 걸림돌은 없다. 인사와 소개를 했으니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 무리가 없다. 그녀는 내게 왜 파티에 혼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서로 묻지 않은 사실이지만, 나 역시 그 얘기부터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왜 망망대해에 혼자 떠 있어야만 했는지 알리고 싶다. 그녀도 마찬가지 마음인 것 같다.

 “갑자기 눈 다래끼가 났대요. 어제 밤만 해도 멀쩡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눈 주변이 욱신거렸고, 파티 시간이 다 되어서는 자기 눈으로 그게 보일 정도로 커졌다고 해요. 할 수 없이 혼자 왔죠. 맘 같아선 선글라스를 끼고 오라고 하고 싶었지만요.”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급히 서두르거나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는 일은 없다. 상대방의 말이 완전히 끝났는지 확인하고도 5초가 지나서야 비로소 발언권을 갖고 다음 말을 이어간다. 상대가 말할 때는 그 이야기에 빠져들어 공감의 리액션을 한다. 그런 서로에게 더 호감이 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런 파티에 혼자 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하면서 거울을 보는 것 같아서 깜짝 놀란다. 이렇게 만나기 직전까지 각자가 가졌던 두려움과 불안은 이제 함께 하는 시간을 유지하는 윤활유가 되고 있다. 나의 존재를 혹시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나의 존재 때문에 상대방의 두려움과 불안이 잠시나마 불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린 이미 서로 확인했다. 이 화려한 망망대해에서 우린 서로 의지하고 있다. 친근감을 느낀다.

 상대가 나처럼 낯을 가리고, 여러 사람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을 반도 채 못하는 성격이란 걸 알게 된 후로 왠지 대담해져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의례적인 질문은 멈추고, 사적인 걸 물어본다. 상대방의 대답도 솔직하다. 같은 종족인 걸 확인한 안도감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

 이쯤 되면 사람에 대한 나의 기호를 밝히는 방식으로 상대방에 대한 호감을 표현할 수 있다.

 “전 소시민적인 사람이 좋아요. 제가 만든 정의예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는 걸 싫어하고 무게 중심은 늘 뒤쪽으로 가 있죠. 조용히 주변을 살피고, 호전적인 무언가가 없는 걸 확인한 후에 편안함을 느끼는 부류죠.”
 “소시민적? 맘에 드는 말이네요. 그런 부류가 되려면 뭐가 또 필요하죠?”
 “먼저 소심인이 되어야 하죠.”

 우린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서로에게 편안함을 느낀 다음엔 불필요한 부끄러움은 드러내지 않는다. 서로에게만큼은 아주 사교적이며 솔직하고 대담하다. 그러다 대화중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기라도 하면 다시 우리 목소리의 볼륨을 페이드아웃하고 그 사람 얘기를 경청한다. 그 사람이 자리를 뜨면 다시 우린 수다쟁이가 된다.

 파티가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다. 서로에게 몰입해서 이야기를 나누느라 2시간이 흘렀다. 주변 사람들은 한 잔씩 마신 술이 누적된 탓에, 여러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느라 허기진 탓에 지친 얼굴들이다. 하지만 우린 다르다. 우리의 얼굴은 더욱 더 빛나고 있다. 망망대해에서 찾은 진귀한 보석을 살피며 내가 이걸 이 넓은 데서 어떻게 얻은 거지? 하며 의아해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우린 서로를 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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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나갈까요? 제가 잘 아는 케이크 가게가 있어요.”
 “아니, 어떻게 아신 거죠? 제가 케이크 좋아하는 거요! 혹시 소시민적인 사람들은 케이크를 좋아하나요?”
 “하하. 그건 아직 증명하지 못했네요.”

 가상의 파티 얘기를 통해 소심한 사람들의 위대한 승리의 장면을 그려보았다. 사람에 따라 소심함의 양상은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만남에 대한 기대가 있는 상황에서 소심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게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모든 상황이 나의 편이어서 상상 같은 일이 벌어진 적도 있지만, 대게, 소심한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진 않는다. 여러 번 보고 일정한 시간을 두고 서로를 알아간 뒤에야, 아 저 사람은 나와 같은 부류구나. 속 깊은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사람이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케빈과 위니는 아주 잘 맞는 짝이다. 둘 다 소심한 성향을 지녔고 어린 시절부터 동네 친구로 보아왔기에 무척 편안하다. 소심한 두 사람이 편안함을 공유할 때 가지는 특별한 연대의 감정을 두 사람은 가지고 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하고 서로를 이성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빈이 다른 여자 애들에게 기웃거리고, 위니가 학교의 인기남과 썸을 타며 주목받는 아이가 되었던 그 시절은, 나와 꼭 맞는 상대, 내 최고의 사랑은 지나고 난 후에야 땅을 치며 알아차린다는 증명 되지 않은 법칙의 예로 삼아도 무방할 것이다.

 아까 상상의 이야기에서 서로의 소심함을 확인한 사람들은 오히려 대담해지고, 솔직해진다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이 사실을 체감하고 있다. 때때로, 소심하던 시절, 서로에게 말하고 싶어도 말을 아껴두던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내는 나와 친정 식구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여전히 소심하게 군다. 가끔씩 나를 남처럼 대해달라고 주문하지만, 이미 다리를 건너온 후다. 어쩌면 내 삶에서 결핍되어 가는 소심함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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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스팀잇 생활하시나요?
무더위야 가라!!!!

무더위 안녕~~ㅎ

오랜만에 케빈을 보내요^^

네 아스라한 기억 속에 케빈~ 기억하시죠ㅎ

소심인 이야기 와닿는것은 소심인이라서 그렇겠지요.

네 맞습니다. 공감되시면 소심인ㅋㅋ

소심인...소시민..
제 얘긴가요
저도 한 소심하고 소시민이기도 하고..
소심과 소심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낸다면
주변에 또 다른 소심이를 찾아볼래요^-^

웰컴투 소심월드~~ 디디엘님은 그럴줄 알았어요ㅎㅎ
소시민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그려봐요!

우리 소시민들 만나서 대범해집시다!!!^-^

대담한 사람은 그 신호가 여운을 남길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바로 신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저도 소심인 같군요!! 행동으로 나서지 못했으니...ㅠ
이러니 짝꿍이 없지~~ ㅠ

토닥토닥~

^________________________^ 북키퍼님때문에 힘이 나네요! ㅎㅎ

독거님은 대범하시고 배포가 크신데 유독 애정 문제 있어서만큼은 소심인이시군요ㅎㅎ
이제 분연히 일어나 나서시길 바랍니다!ㅋ

사람마다 약점이 있기 마련이죠!! 제가 이쪽에 큰 약점이 있나봐요~ 어쩌죠? ㅎㅎ

아무 약점이 없으면 세상 공평하지 않죠. 근데 약점이 하필..ㅎ;; 독거님,, 이름부터 바꾸시는게,, 아 독거,,

사실 연애말고도 약점 투성이라....ㅋㅋㅋㅋㅋㅋ

독거님도 크리스마스 밋업에 참여하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소심인들이여 일어나라!!!!! ㅎㅎ

헉~ 이말은 그냥 올해는 혼자 있으란 이야기 같이 들리네요! ㅋㅋㅋㅋㅋㅋ

헉;;;아...아니예요..
독거님 취소되셨습니다!! ^_^;;;

소심인이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는 한 사람으로써.. 그저 신중한것이라도 위로를 해봅니다..ㅋ

네 신중함은 소심인이 가진 효용중 하나죠ㅎㅎ

아이의 이가 나지 않아 잇몸 안에서 썩은게 아닐까라고 의심하다가 그렇게 믿어버리고 치과에 진찰받으러 가서 멀쩡하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안심하는 극 소심쟁이 아내도 저에게는 죽고잡냐 라는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합니다..

우리 모두 아내의 소심함을 그리워하는 모양입니다ㅎ 이래서 부부는 서로 채워준다고들 하나봅니다. 소심한 아내의 남편들은 아내의 과감함을 채워주는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하니 말입니다ㅎ

엄청나게 소심한 1인인데 나이들어 좀 바꼈네요. 지금은 엄청나게 외향적인...ㅋㅋ 식당을 하면서 좀 바뀐듯 하네요. 아무한테나 막 말걸고...ㅋㅋㅋ
글 첨부터 끝까지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

네 소심함은 나이를 먹거나 직업에 따라 바뀌더라구요. 식당하시면서 소심하면 서비스를 제대로 할 수 없을지도,, 훈련되셨군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

나이가 드니 결핍되어 가는 것도 종류가 다양해진것 같아요. 소심함도 그립군요. 오늘은 그리운게 많아서 몹시 배가 고픕니다.

마음이 공허하고 허기진 느낌이예요. 누군가의 자리가 비고 나이 먹으면서 상실하는 것도 많아지고.
맛있는 빵 내밀고 싶네요. 에빵님 허기를 채우시게요. ^^

글을 딱 읽고 난 순간 제 얼굴에 미소가 싸악 번지네요~~

결핍되어 가는 소심함에 대한 그리움

아 이 표현 우째요 설레게 가슴 찡하네요.^^

ㅋㅋㅋ 역시 rideteam님과 많은 공통 분모가 있는 거 같네요. 결혼 후에 채워진 게 많지만, 결핍되어 가는 것도 있지요. ㅎㅎ 그저 그리워하며 이렇게라도 푸는 수 밖에요.
가슴 설렐 정도시면, 소심함이 무지 그리우신가봐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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