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의 노래」 마지막 파트를 읽고 눈물 짓다 - 인생이 전쟁이로구나

in #kr6 years ago (edited)

marcus_aurelius_and_the_praetoria_xiv_cohort_by_deltaforce114-d4k0x91.jpg

모든 복수가 끝나자 샤를 대제의 분노는 어느덧 옅어지고 말았다. 그에게 대적하던 이교도들은 그에게 모두 무릎 꿇고 세례를 받았지만 대제는 날이 갈수록 침울해졌다.
큰 방에 놓인 옥좌에 앉아 잠들어 있던 대제의 꿈에 하느님이 보낸 성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다.
"샤를, 네게 급히 주어진 임무가 있다. 신실한 하느님의 종 비비앙의 영지가 야만스런 이교도들에게 포위되었다. 고통 받는 기독교인들이 네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중이다."
잠에서 깬 샤를 대제는 주름 가득한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싸움으로만 인생을 지새우는가?"
대제는 자신의 새하얀 수염을 매만지며 탄식했다. 그의 두 눈에 물기가 고였다.
『롤랑의 노래, 마지막 챕터』


어쩌면 나는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남들은 별 이상하게 써내도 멀쩡히 정상으로 나오는 신검 정신검사 항목에서, 어머니가 차려 준 아침밥 잘 먹고 테스트를 수행한 나는 비정상을 받았다.

정신병자는 들어온 일을 제대로 소화하는 기능이 없다. 조신하게 서류 상으로만 또라이였던 나와 달리, 훈련소에 들어오자마자 미친 놈으로 찍혔던 어떤 친구가 있다. 그 녀석은 훈련 중 누구와 어깨가 부딪치면 그걸 마음 속에 담아 두고 밤잠을 설쳤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어깨를 부딪힌 사람에게 달려들어 주먹질을 했다. 맞은 사람은 왜 맞았는지 영문도 모르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사람들은 왜 내가 문제를 껴안고 사는지를 잘 모른다.

내 뇌에는 망각하는 기능이 없어서 벽 안으로 들어온 문제는 고스란히 안고만 살아야 한다. 그러다보니 해야할 일이 많다. 탐욕도, 투쟁심도, 때로는 살벌한 무관심이나 이기심도, 실은 그냥 다 덮어놓고 살 수가 없는 위인이 살아보려다 보니 어떻게든 만들어낸 수단들이다.

살아보니 평범하고 여유있는 게 최고라고 그러던 형에게, 나는 한 번 사는 인생 그렇게 살기 싫다고 그랬지만 그렇게 살기 싫은 게 아니라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거다.

몇 년 전 일기장에, 꾸역꾸역 강제로 받아 처 먹는 교훈이 너무 많아서 그만 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쓴 적이 있는데 요즘이 딱 그 지경이다. 매 하루가 전쟁. 다 해결되고 그들은 영영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원래 영화에나 나오는 거다.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으면 저 문제가 다시 들고 일어나고, 저 문제를 해결하러 가면 다시 이 문제가 올라온다. 그래서 매번 싸우러 나가야 한다. 말 그대로 상재전장(常在戰場).

근데 이 전쟁이라는 게, 빠바밤 웅장한 음악을 들으며 링에서 멋지게 싸우는 것과는 원래 거리가 멀다. 매번 스트레스에, 결정되지 않은 일에 초조해하고, 고심 끝에 악수를 두고 이 과정 속에 감정적 자극으로 심신이 나가리가 난다. 호쾌한 전격전 따위는 없고, 무더위 속에 행군, 삽질, 행군, 삽질 반복. 이러다 총 한 번 못 쏴보고 콜레라나 걸려 설사하다 죽을 기세. 생각을 그만두고 잠이나 자고 싶은데, 나이는 속절 없이 먹고 있어서 초조하기 그지 없다.

샤를 대제가 만든 거대한 프랑크 왕국도 말년에는 천연두랑 바이킹 때문에 걸레짝이 됐지. 일평생 머리를 쓴 결과물이 박살나는 걸 본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게다가 샤를 대제는 그래도 제국의 왕이었지만 내가 가진 거라고는 분수에 맞지 않는 대형차와 좁은 원룸 하나 밖에 없는데 도대체 뭘 위해서 매번 머리를 싸매며 미래를 기약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해결해야 할 문제 투성이다. 머리가 아파 죽겠고, 어떻게 해야할지, 도대체 올해 안에 몇 개라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차피 메커니즘이 바뀔 나이는 아니고 자살할 용기도 없으니 그냥 이대로 살다가 빨리 늙어 자연사나 하고 싶다. 말은 이렇게 썼지만 겁이 많아서 안 아프게 죽고 싶으니까 데헷.

그나마 잘 때 따뜻한 이불은 덮고 하루에 8시간은 잘 수 있어서 다행이다.

잠이나 자자.

Sort:  

ㅎㅎㅎ

늙으면, 속절없이 빨리 or not, 망각하는 기능이 점점 더 활성화되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ㅎㅎㅎ 어쩐지 저는 노욕에만 가득찬 꼬장꼬장한 노인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어차피 어느 것 하나 들고 다음 세상으로 갈 수 없으니 망각하고 사는 노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당

살아있는 모든 것은 이런저런 문제를 떠안고 살 수 밖에 없나 봅니다 ㅎㅎ

그렇겠죠? ㅋㅋㅋㅋㅋ 아 호랑이 멋있어요 다시봐도

잠이나 자자 ~
왠지 고민을 다 떨쳐버리는 말같아요

잠도 못 자고 사는 사람들도 많으니 사실은 복된 사람인지도요 ㅋㅋㅋ
잘 때가 제일 행복

사실 자기 연민에 빠지고 싶지 않아서 저렇게 글을 끝냈습니다

그나마 잘 때 따뜻한 이불은 덮고 하루에 8시간은 잘 수 있어서 다행이다.

글을 읽으면서 무슨 댓글을 달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마지막에 알아서 치유하시는데요? 지금 따뜻한 이불을 덮고 주무시겠군요. 이 글로 위로를 받습니다. 저도 얼른 따뜻한 이불 덮고 자야겠어요.

그대로 끝내면 꼴사나운 자기 연민으로 끝날 것 같아서 일부로 적었습니다 ㅋㅋㅋ 그리고 실제로 힘든 일이 있으면 따뜻한 이불 부둥켜 안고 잘 수 있는 게 제일 위안이더라고요. 위로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셨길 바랍니다 ^^

전쟁 나가기 전에, 혹은 전쟁 끝나고 나서 스스로를 위한 타로를 읽기도 하시는지 궁금.

ㅎㅎㅎㅎ 전혀 보지 않습니다.. 10년 전에 그랬다가 망한 적이 있어서요 ㅜㅜ 자기한테 급한 일에 쿨하고 객관적으로 리딩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요? ㅋㅋㅋ

욕심쟁이십니다.
다 해결을 보려하시다니.
하나도 해결하지 않고 덮어놓고 쌓아 놓고
도망치는 사람들 천지인 세상에.....

그게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분수도 모르고 ㅋㅋㅋㅋ

머리가 복잡할 때는 몸을 많이 써보세요.

피가 온몸을 돌아야
생각도 잘 정리가 되거든요.

그럴까 합니다 ㅎㅎ 간만에 좀 뛰어야겠네요. 몸을 쓰며 사는 사람이 건강한 거 같아요 ㅎㅎ

조언 감사드립니다^^

"나는 싸움으로만 인생을 지새우는가?"

오늘의 글은 마법사의 가슴을 후벼파는 군요.작년 이맘때쯤 안개 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롤랑의 전장이었던 론세스바예스를 지나가는 길에 백마를 보았습니다. 일행은 왠 말인가 했으나 저는 유니콘일 거라 했죠. 승리도 반복되면 지칩니다. 도전으로 인생을 지새우고 있는 마법사도.. 또 도전을 시작했지만 그 마지막이 프랑크왕국의 말년과 겹쳐보여 벌써부터 씁쓸합니다. '나는 또 누군가의 삶에 기적이 되어야 하는가..' 가슴 뭉클한 일이지만 지쳐가는 일이기도 하답니다. 그럼에도 자살이야 하겠습니까? 낙이라면 전사들과의 우애 그것뿐.. 오히려 마법사는 수많은 승전은 있었으나 끈끈한 우애는 겪어보지 못한 듯 하니.. 그저 이번 전쟁에 판관님과의 전우애를 누려볼 수 있다면 샤를마뉴에게 부러움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롱스보 평원을 론세스바예스라고 하는군요... ㅎㅎ

승리도 반복되면 지친다는 말은 맞는 거 같아요, 누군가는 나폴레옹이 승리와 자극이 반복되는 삶이 싫어서 고의로 워털루에서 패배했다는 분석까지 했으니까요(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자기 뜻대로 안 되고 다 헝클어지는 걸 보는 걸 ㅋㅋㅋㅋ 무엇 때문에 아둥바둥해야하는건지 모를 때가 있네요, 어차피 멀리서 보면 인간 하나의 행동이야 수족관에 갇힌 놈 중 좀 더 격렬히 버둥치는 놈과 그렇지 않은 놈 차이일지 모르겠네요

ㅎㅎ 그래도 마법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 과정에서 비록 찰나일지 모르지만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이야 말로 살아가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네요. 그 끝이 롤랑처럼 전사하는 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ㅎㅎㅎ 저희 스팀시티 전사들과 마법사님의 우애와 무용담이 펼쳐질 수 있길 바랍니다

멋있는 노신사가 될 겁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죽음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죽음을 무서워하는거야...큐브릭 초기 영화 대사였던듯.

'데헷'?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 똥폼 잡아도 집에서 따뜻한 밥 잘 먹고 뒹굴거리는 내가 솔직히 soldier는 아님
  2. 자기연민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싫었음
  3. 안 아프게 죽는 거는 천만금의 가치가...ㅋㅋ

제이미 누나만 반말로 달으셨네, 반말 오랜만

Coin Marketplace

STEEM 0.29
TRX 0.12
JST 0.032
BTC 60787.40
ETH 2994.79
USDT 1.00
SBD 3.82